호기심, 관심사

시작하는 방법은 그냥 시작하는 것이다


시작하는 방법은 그냥 시작하는 것이다
시작하지 못하는 단 한 가지 이유는 시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뭔가를 시작하는 방법을 너무 오랫동안 연구할수록 시작하는 방법을 알게 되지만
정작 시작하지 않는 방법에 익숙해지기 시작한다.

시작하는데 필요한 것은
그냥 시작하는 몸의 행동이나 실천이다.
시작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시작하겠다고 결심을 하고
시작하겠다고 결의를 다지고
시작하겠다고 결단을 내려도
시작하지 않으면 시작할 수 없다.

시작하는 특별한 방법은 정말 없다.
물론 어느 정도의 준비는 필요하다.
그러나 시작을 하고 나서도
얼마든지 더 준비를 하고
어제와 다른 방법으로 오늘을 시작할 수 있고
내일은 오늘보다 더 멋진 방법으로 시작할 수 있다.

시작하기 가장 좋은 때는 지금이다.
시작하기 좋은 완벽한 때를 기다리다
몸에 때만 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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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이 없는 사람들의 세 가지 문제 - 유영만 교수님


개념이 없는 사람들의 세 가지 문제



개주소(槪注所, 개념주입소)는 주기적으로 개념을 주입(注入)하는
단골 지유소(知油所)

"지역마다 적당량의 개념을 주입해 주는 개주소(개념주입소) 시설이 있었으면 좋겠다. 개념이 없는 인간들이 인터넷에 접속하면 자동으로 하드가 절명해 버리는 장치도 개발되었으면 좋겠다. 프로그래머들이 넷좀(인터넷 좀벌레-악플러)들의 접근을 차단시키거나 박멸해 버리는 살충제도 개발해 주었으면 좋겠다." 《이외수의 생존법: 하악하악》에 나오는 말이다. ‘개주소’는 개가 사는 동네 주소가 아니라 개념 없는 사람들에게 개념을 주기적으로 주입하는 지유소(知油所)다. 차는 연료가 떨어지기 전에 주유소에 가서 연료를 채워 넣지 않으면 계속해서 운행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사람은 개념이 부족하거나 없어도 살아가는데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차는 연료가 부족하면 경고등이 들어오지만 사람은 개념이 부족해도 본인이 스스로 자각하는 경우는 드물다. 다만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해보거나 자신의 생각을 글로 옮겨보면 어느 정도 개념을 습득하고 있는지 상대방이 판단할 수 있을 뿐이다. ‘개념이 없다’는 말의 ‘개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따라 이 말도 다르게 이해할 수 있다. 나아가 개념이 의미하는 바에 따라 개념 없음이 일으키는 문제도 달라지며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도 달라진다. 개주소에 들려야 할 세 사람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가 달라서 주입할 개념도 달라진다. 다르게 말하면 개념 없음이 의미하는 바가 다르고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문제가 달라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도 달라질 수 있다. 우선 개념이 없을 경우 나타날 수 있는 세 가지 문제를 살펴본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색다른 발상을 하는데 필요한 개념이 떨어지거나 부족하면 세 가지 문제가 생긴다. 첫째, 개념이 없으면 대화가 어려워지거나 대화가 이루어진다고 해도 상식 없는 사람으로 판가름 나기 쉽다. 이 세상에서 제일 상식 없는 사람이 ‘개념’ 없는 사람이다. ‘개념’이 없는 사람에게는 ‘개념’을 쳐야 한다. 개념탑재가 필요하다. 음식 맛을 돋우기 위해 양념을 치는 것처럼 내 생각을 적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색깔과 맛을 지닌 ‘개념’을 쳐야 한다. 개념 없는 사람은 상식 이하의 판단을 하거나 마땅히 지켜야 될 예의범절을 지키지 않아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사람이다. 일반적으로 개념이 없다는 말은 상식이하나 무식하다는 말을 의미한다. 그래서 개념이 없다는 말은 생각 없이 행동한다는 말과 거의 같은 의미다. 둘째, 개념이 없다는 말의 또 다른 의미는 자신이 말하고자하는 메시지의 핵심과 본질 또는 전달하고자하는 메시지의 핵심과 본질을 꿰뚫는 한 마디가 없다는 의미다. 이런 경우 개념이 없다는 말보다 컨셉(concept)을 모르겠다는 말을 더 자주 사용한다. 예를 들어 신제품 개발 계획에 관한 발표를 다 듣고 난 사장님이 한 마디를 툭 던진다. “그래서 당신이 제품에 담고 싶은 차별화된 메시지를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뭐야?” 그 한 마디가 개념을 의미하는 컨셉이다. 제품 전체를 관통하는 한 마디, 경쟁사 제품 대비 차별화될 수 있는 경쟁력, 제품이 고객에게 제공해줄 수 있는 차별적 가치, 왜 고객이 이 제품을 사야 되는지의 이유 등을 모두 한 마디로 컨셉이라고 한다. 이럴 경우 컨셉이 없다는 것은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겠다는 의미다.

상식이나 생각이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개념이 없다’는 말과 전달하고자하는 핵심과 본질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컨셉이 없다’는 말은 의미상 차이가 있다. 전자가 주로 개념의 본래 의미인 컨셉과 무관하게 생각 없이 살아가는 상식이하의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을 비하하는 발언이라면 후자는 개념의 본래 의미를 비즈니스 맥락과 연결시켜 사용하는 컨셉과 맞닿아 있다. 본래 개념을 지칭하는 영어, ‘concept’은 ‘모두가 좋아하는 또는 공감하는’ 의미를 지닌 ‘con’과 ‘잡다’를 의미하는 ‘cept‘가 합해져서 만든 말이다. 결국 concept은 사전적 의미로 개념이지만 어원적 의미에 비추어 보면 사물이나 현상의 공통적인 속성을 포착, 모두가 공감하는 의미로 이해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결국 ’컨셉이 없다‘는 말은 모두가 공감하는 의미가 없어서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말이다. 컨셉을 제시하려면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꿰뚫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단순명료한 대안을 촌철살인의 메시지로 제시해야 한다. 현상을 언제나 복잡하지만 현상의 본질을 포착하고 이해하는 메시지의 본질은 지극히 단순하다. 복잡함이 단순함으로 전환되면서 사물이나 사실의 핵심과 본질이 겉으로 드러나고 나머지는 숨어 있거나 제거된다. 단순한 컨셉은 복잡한 세상 속에서 치열한 사투 끝에 건져 올린 메시지의 정수다. 컨셉이 복잡하다는 의미는 아직 치열한 노력을 통해 단순화시키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단순함은 치열함의 산물이고 복잡함은 나태함의 산물이다. 컨셉이 없다는 말은 아직 복잡하다는 말과 같은 의미다.

개념이 없으면 세상을 (다르게) 인식할 수 없다!

개념이 없을 때 발생하는 세 번째 문제는 철학적 문제로서 근본적으로 다르게 생각하지 못하는 문제와 맞닿아 있다. 앞에서 논의한 두 가지 문제보다는 본질적이다. 컨셉을 철학적 개념으로 이해하면 앞의 두 가지 문제와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에 직면한다는 의미다. 주로 비즈니스 분야에서 사용하고 있는 개념의 다른 뜻으로 사용되는 컨셉을 철학적 의미로 다시 번역하면 개념이다. 그런데 철학에서 말하는 개념은 일상적 의미로 쓰이고 있는 ‘개념이 없다’는 말의 개념과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철학에 있어 개념은 ‘개별적 사물이나 현상에 공통되는 특성을 포착하여 하나의 범주로 묶어주는 관념’으로 세계를 파악하는 생각의 도구이자 인식의 틀이다. 아무리 외부 세계를 보고 느끼고 생각해도 의식 안에 외부 세계에서 지각한 사물이나 현상을 포착할 수 있는 도구나 틀이 없다면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한다. 꽃에는 장미, 라일락, 할미꽃, 벚꽃, 모란꽃 등 수많은 개별적 꽃이 존재하지만 서로 다른 꽃 속에 존재하는 공통된 속성을 꽃이라는 개념으로 파악해서 꽃을 이해하는 것이다. 개념의 영어 단어, ‘concept’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모두에게 공통되는 ‘con'과 ’잡다‘를 의미하는 ‘cept’의 합성어다. 이런 점에서 개념은 다양한 사물이나 현상에 존재하는 공통된 속성을 파악(把握)하는 인식의 틀이자 도구다. 결국 개념이 부족하거나 없다는 이야기는 세상을 파악하는 인식의 틀이 부족하거나 없다는 이야기다. 세 번째 문제가 바로 이 책에서 다루고 싶은 가장 심각하고 근본적인 문제다. 철학에서 말하는 '개념'이란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인식의 도구나 틀이란 뜻으로 쓰이기 때문에 이 경우에 '개념이 없다'는 건 사고나 판단의 치명적 결함이 된다는 뜻이다.

개념은 내가 세상을 바라보고 어제와 다른 방법으로 생각하기 위한 인식의 틀이자 사고의 도구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노력해야 될 일 중의 하나는 나를 표현하고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개념’을 배우는 것이다. 새로운 개념을 배우지 않으면 우리는 지금까지 배운 개념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1년 전에 내가 썼던 개념을 1년이 지난 지금도 비슷하거나 동일한 개념을 반복해서 쓰고 있다면 나는 개념 없이 1년을 살아온 것이다. 개념 없이 살았다는 이야기는 생각의 변화 없이 1년을 살았다는 이야기다.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제와 다른 개념을 갖고 있어야 한다. 청소년기에 습득한 개념으로 청년기를 살아가가는 사람, 청년기에 습득한 개념으로 중장년을 살아가는 사람은 더 이상 공부를 하지 않고 예전의 생각 수준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다. 사람은 그 사람이 습득한 개념이다. 개념을 끊임없이 공부해야 되는 이유는 동일한 개념이라고 할지라도 예전의 개념과 다른 의미로 재탄생하기도 하고 다른 맥락에서 다른 의미로 변형 적용되어 쓰이면서 색다른 개념으로 거듭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개념을 공부하는 더 중요한 이유는 개념적 렌즈가 세상을 바라보는 안경이기 때문에 어떤 개념적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세상으로 이해되고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개념은 저마다의 문제의식과 탄생 배경을 갖고 있다. 특히 철학적 개념은 그 개념을 창조한 사람의 문제의식이 녹아 있다. 자신의 철학적 사유의 핵심을 이전 개념으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기존 개념에 색다른 의미를 부여해서 재개념화시키거나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개념을 부단히 창조한다.

개념이 없다는 말의 세 번째 의미는 똑 같은 세상을 다르게 파악할 수 있는 인식의 틀이자 생각의 도구인 개념이 없다는 의미다. 이미 존재하는 개념도 끊임없이 변신을 거듭하면서 재창조되거나 기존 개념의 의미가 새롭게 정의되기도 하고 기존 개념을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재조합해서 새로운 개념으로 부각되기도 한다. 다르게 생각하는 방법은 결국 이전과 다른 개념을 활용하여 사물의 본질이나 핵심을 파악하는 방법이다. ‘개념’은 사물이나 대상의 본질을 지칭하는 ‘컨셉’에서 출발한다. ‘개념’에는 ‘개념’이 지칭하는 사물의 본질을 담고 있다. 자신이 포착한 사물이나 대상의 본질이 ‘개념’을 통해서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모든 개념은 저마다의 사연과 배경, 그 개념을 창조한 사람의 철학과 신념을 담고 있다. 세상의 수많은 ‘개념’에는 나름의 사연과 아픔이 있다. 개념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개념에 담긴 사연과 배경, 철학과 신념을 이해하는 일이다. 우리가 ‘개념’을 배우는 것은 사물이나 대상의 본질, 나아가 세상과 우주의 원리를 이해하는 원료를 배우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개념은 누군가 자신의 철학과 주관으로 물들인 신념의 산물이다. 따라서 남의 정의한 개념은 나에게는 아직 관념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남의 개념에 나의 신념과 철학이 추가되지 않으면 한낱 관념의 파편에 불과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신념’없는 ‘개념’은 ‘설득력’이 없다. '개념'없는 '신념'은 부실하다.

단어가 세계를 창조한다!(Words create worlds)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 《안녕 시모키타자와》에 보면 “어렴풋 알고 있는 것을 누군가 언어로 분명하게 말해주면 이렇듯 마음이 편안 진다”는 구절이 나온다. 경이로운 자연 경관을 바라보고 감탄사를 연발할 뿐 그 광경을 표현할 언어가 부족해서 더 이상 할 말을 잃는 경우가 있다. 우연히 먹어본 음식을 보고 기가 막힌 맛에 침을 삼킬 뿐 적절한 어휘가 없어서 감탄사만 연발할 때가 있다. 우연히 마주친 너무도 아름다운 여인의 매혹적인 매력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부족해서 그냥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던 경험을 누구나 한 번쯤은 해보았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순간과 장면, 전경과 배경, 잊을 수 없는 풍경과 광경에 대한 나의 체험적 느낌이 이미지로 기억의 한 편에 자리 잡고 그걸 다시 인출하여 글로 쓰려고 할 때 생각만큼 쉽게 글로 옮겨지지 않는 것도 내가 갖고 있는 언어의 한계 때문이다. 체코의 한 서점 슬로건, Words create worlds, 즉 단어가 세계를 창조한다. 내가 갖고 있는 단어가 내가 창조하려는 세계를 결정한다. 세계를 다르게 창조하려면 다른 단어가 필요하다. 내가 사용하는 단어가 바뀌지 않으면 내가 창조하고 싶은 세계도 바뀌지 않는다. Words create worlds에서 'Worlds'를 기업에서 개발하고 싶은 신제품이나 서비스(Products & Services)로 바꾸어 놓고 생각해보면 훨씬 쉽게 와 닿을 것이다. 내가 사용하는 단어의 세계가 내가 상상하고 만들 수 있는 제품과 서비스를 결정한다. 아무리 위대한 생각과 아이디어를 갖고 있어도 이를 표현할 수 있는 적절한 단어가 없다면 이전과 제품과 서비스는 창조되지 않는다. 어제와 다른 제품과 서비스는 어제와 다르게 표현할 수 있는 어휘력이 결정한다.

내가 사용하는 단어의 세계가 내가 생각하는 세계를 결정하는 재미있는 예를 들어보자. 부부 싸움하고 난 뒤 부인이 남편에게 차려주는 30일 동안의 식단이다. 첫날 콩부터 시작해서 나물과 콩나물, 그리고 콩나물국을 거쳐 마지막 30일 째는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그 동안 쌓였던 분풀이 차원에서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콩나물죽여살려밟아찢어꿰매눌러당겨돌려뽑아잘라갈라볶아말아국’을 끓여준다. 부인이 이렇게 다양한 서른 가지 요리를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은 서른가지 요리에 동원되는 단어를 알고 이를 조합하는 능력 덕분이다. 만약 부인이 콩이라는 단어 한 가지만 알고 있다면 훨씬 적은 종류의 음식밖에는 만들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좋은 요리 아이디어가 떠올라도 그걸 포착해서 적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부족하기 때문에 생각하는 대로 요리를 만들 수 없다. 결국 내가 어떤 요리를 할 수 있느냐는 다양한 요리를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어휘력이나 개념 조합능력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1일 콩
2일 나물
3일 콩나물
4일 콩나물국
5일 콩나물무침
6일 콩나물도리탕
7일 콩나물무쳐튀김
8일 콩나물무쳐튀김찜
9일 콩나물무쳐튀겨볶음
10일 콩나물무쳐튀겨쪄데침
11일 콩나물무쳐튀겨끓여조림
12일 콩나물무쳐빨아삶아끓여찜
13일 콩나물무쳐끓여던저받아튀김
14일 콩나물수육포떠또떠막떠다떠탕
15일 콩나물삶아건져담가말려찢어중탕
16일 콩나물끓여식혀덥혀익혀말려푹쪄찜
17일 콩나물다시무쳐끓여돌려주고받아데침
18일 콩나물다시무쳐다시끓여다시받아다시찜
19일 콩나물먹어뱉어다시삼켜다시게워그걸무침
20일 콩나물심어길러뽑아갈아끓여삶아데쳐때려탕
21일 콩나물말아돌려풀어볶아삶아끓여갈아모아튀김
22일 콩나물훔쳐들켜튀어잡혀맞아터져부어그걸밟아국
23일 콩나물꼬셔벗겨입혀볶아데쳐튀겨씻어빨아말려조림
24일 콩나물때려울려달래그걸볶아삶아무쳐조려다려불려탕
25일 콩나물끓여식혀무쳐줬다뺏어다시끓여식혀무쳐푹삶아탕
26일 콩나물잘라붙여갈라쪄무쳐던져받아놓쳐버려그걸주어볶음
27일 콩나물꼬아말려붙여늘려그걸잘라갈아뿌려주어팔아키워부침
28일 콩나물끓여말려갈아불려국쒀개줘때려뱉어모아삶아빨아신선로
29일 콩나물심어길러모아팔아골라골라때돈모아부어마셔망해도길러찜
30일 콩나물죽여살려밟아찢어꿰매눌러당겨돌려뽑아잘라갈라볶아말아국

다양한 경험을 갖고 있어도 그 경험을 포착할만한 적절한 개념이 없다면 그냥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며 기억이 날 것 같기도 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 결국 색다른 경험이 계속 축적되어도 그 경험이 내포하는 소중한 의미를 포착할 수 없게 된다. 똑같이 여행을 갔다 왔어도 누군가는 여행에서 마주친 색다른 체험을 자기만의 개념으로 포착, 많은 사람들의 공감대를 자극하는 감동적인 글로 표현하지만, 개념이 없는 사람은 그저 “재미있었다”, “즐거웠다”, “감동적인 광경이었다” 정도로 표현되지 않는다. 무슨 음식을 먹었는데 얼큰하고 담백하면서 동시에 시원해서 음주 후에 속 풀이 해장으로는 최고로 이야기를 하지만 그런 음식을 포착할 개념이 없다면 그저 잡다한 이미지나 생각으로 기억의 저편에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만약에 지금 먹은 “얼큰하고 담백하면서 동시에 시원한 음식”을 김치찌개라는 개념으로 포착했다면 모호했던 잡다한 인상들을 보다 일반적으로 보편화시켜 그 의미를 오랫동안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도 있다. 세상은 내가 어떤 개념적 렌즈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이고 이해된다. 세상을 다르게 보고 다르게 생각하고 싶다면 이전과 다른 개념을 갖고 있어야 한다. 언제나 세상은 내가 보유한 개념적 넓이와 깊이에 따라 다르게 이해되고 해석될 수 있을 뿐이다.

한 분야에서 색다른 체험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기존의 개념으로는 그런 색다른 체험을 표현하거나 설명할 수 있는 적절한 개념이 부족하다면 색다른 체험은 그저 한 사람의 개인적인 체험으로 끝날 수 있다. 그래서 철학자들이 이전 철학을 비판적으로 계승함과 동시에 또는 이전 철학의 한계와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새로운 철학적 사고체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는 이유다. 예를 들면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가 독자적으로 만들어 사용한 차연(differance)이라는 개념은 차이를 지칭하는 ‘difference’의 어미 ‘-ence’를 ‘-ance’로 바꾸어서 만든 신조어다. 차연이라는 개념은 ‘다르다(differ)’라는 의미와 ‘연기하다 ·지연시키다(defer)’라는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는 프랑스어 ‘differer(디페레)’가 포함되어 있다. 한 개념의 차이는 지금 여기서 고정할 수 없다. 동일한 개념이라고 할지라도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다른 의미로 정의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연은 다른 개념과의 차이를 통해서 개념의 본질을 파악하는 노력을 지금 여기서 확정하지 말고 시공간적으로 연기 또는 지연하자는 의도를 담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단어는 다른 단어나 단어들 간의 차이에 따라 정의되는데, 단어를 정의하는 데 동원되는 다른 단어의 의미도 시공간적으로 사람에 따라 다르게 정의되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색다른 발상을 하는데 필요한 개념이 떨어지거나 부족하면 세가지 문제가 생긴다. 
첫째, 개념이 없으면 대화가 어려워지고 대화가 이뤄진다고 해도 상식없는 사람으로 판가름 나기 쉽다.
둘째, 개념이 없다는 말의 또 다른 의미는 자신이 말하고자 또는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의 핵심과 본질을 꿰뚫는 한 마디가 없다는 의미다. 이런 경우 개념이 없다는 말보다 컨셉(Concept)을 모르겠다는 말을 더 자주 사용한다.
개념이 없을 때 발생하는 세번째 문제는 철학적 문제로서 근본적으로 다르게 생각하지 못하는 문제와 맞닿아 있다. 개념은 사물이나 현상에 존재하는 공통적 속성을 파악하는 인식의 틀이자 도구기 때문에 개념이 없다는 건 사고나 판단의 치명점 결함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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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발상과 정발상: 역발상이 곧 정발상인 시대가 오고 있다!

출처 : http://kecologist.blog.me/70162906842?utm_source=twitterfeed&utm_medium=twitter


반대로 반대로 뒤집고 돌리고... 생각만 해도 손해나는건 없지 않은가? 생각도 안하려고 ?


식상한 사람은 상식의 틀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다. 상식을 뒤집으면 오히려 식상해진다. 식상한 사람은 상식에 시비를 거는 몰상식한 사람의 발상을 인정하지 않는다. 상식의 세계에서는 도저히 통용될 수 없는 원칙이나 생각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신입사원을 채용하기 위해 상식적인 사람들이 면접관으로 임명되면 상식을 벗어나는 사람들이 채용될 수 있을까? 상식의 세계에 시비를 걸고 정상적인 사람의 발상에 의문을 던지는 비정상적인 사람은 상식과 정상만이 옳은 것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을 그야말로 몰상식하고 비정상적인 사람들로 취급할 것이다. 그들만의 리그에서나 통용되는 말을 하지 않거나 그들만의 리그에 사는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엉뚱한 발상을 시도하면 이해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뭔가 부족하거나 모자라는 사람으로 판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세상을 이끌어가는 사람은 정상적인 범주에서 벗어나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정상을 정복하려는 사람들이 이끌어간다. 한 마디로 정상에 오른 사람은 정상이 아니다.


                                                <Portable Toaster>

역발상을 시도하는 방법 중에 가장 간단하면서도 그 효과는 상상을 초월하는 발상법이 있다. ‘~에는 ~가 있다’는 말을 ‘~에는 ~가 없다’는 말로 대체하면 아주 새로운 발상이 시작된다. 예를 들면 ‘선풍기에는 날개가 있다’는 말을 ‘선풍기에는 날개가 없다’는 말로 대체하면 ‘날개 없는 선풍기’가 탄생된다. 선풍기에는 날개가 있다는 가정을 그대로 둔 채 혁신적인 선풍기를 아무리 만들어도 그저 그런 선풍기밖에 나오지 않는다. ‘스테이플러에는 침이 있다’는 말을 ‘스테이플러에는 침이 없다’고 역발상을 시도하면 ‘침이 없는 스테이플러(staple free stapler)’가 탄생된다. ‘음식점에는 메뉴가 있다’는 말을 고집하는 한 모든 음식점에는 메뉴가 있는 음식점 밖에 생각이 안 나지만 ‘음식점에는 메뉴가 없다’고 생각하면 메뉴 없는 음식점이라는 새로운 컨셉의 음식점이 탄생된다. 그 때부터 ‘메뉴 없는 음식점’에 손님이 오면 어떻게 주문할 것인지 새로운 발상이 날개를 달기 시작한다. 이처럼 역발상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가정을 없애버리면 그 가정 위에서 생각했던 고정관념을 창조적으로 파괴하고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를 구상할 수 있다.



역발상을 시도하는 두 번 째 방법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래 그렇다’, ‘당연하다’, ‘물론 그렇다’고 생각하는 이면의 원래, 당연, 물론의 세계에 물음표를 던져 시비를 걸어보는 것이다. 세상에는 원래부터 그런 것이 없으며, 당연한 것도 물론 그런 세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다. 대박 히트 상품이나 전대미문의 새로운 창조는 물음표의 호기심과 궁금함 속에서 느낌표가 탄생하는 과정이다. 예를 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과가 위에서 밑으로 떨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로지 뉴톤만이 당연한 사과의 낙하현상에 대해서 물음표를 던져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다 마침내 만유인력 법칙을 발견한 것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한 우리는 당연하지 않다고 생각한 뉴톤이 출제한 문제에 답을 찾는 인생을 살고 있다. 이처럼 원래, 물론, 당연의 세계에 물음표를 던져 상식이라고 생각한 세계에 몰상식한 발상을 시작, 마침내 감동의 느낌표를 찾는 과정이 역발상이다. ‘관습(慣習)’을 타파하지 않으면 나쁜 ‘습관(習慣)’에 억매여 살게 된다.

                                                 <Squeezophone 360°>


역발상을 시도하는 세 번째 방법은 개념을 뒤집어 보는 것이다. 개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DOG’를 뒤집으면 신을 의미하는 ‘GOD’이 되고 남자를 유혹하여 신에게서 받은 생명을 박탈당한 이브(EVA)를 뒤집으면 구원의 상징, 천국의 문을 의미하는 아베(ABE)가 된다. 삶은 개판이기도 하지만 신의 존재명령이 엄연하게 존재하는 신성한 세계이기도 하고, 마리아의 처녀성을 빼앗은 지옥의 문 이브가 이제 새로운 생명의 탄생으로 인도하는 아베로 변신한다. 나아가 악을 의미하는 단어 ‘EVIL’를 뒤집으면 삶을 의미하는 ‘‘LIVE’가 된다. 삶을 제대로 살지 않으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지옥의 문으로 전락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역경을 뒤집으면 경력이 된다. 남다른 경력은 거저 생기지 않는다. 시련과 역경을 경험한 사람만이 남에게 존경받을 수 있는 아름다운 경력의 소유자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기자가 기사나 사설을 쓴다. 기자를 뒤집으면 자기가 되고, 기사를 뒤집으면 사기가 되며, 사설을 뒤집으면 설사가 된다. 즉 기자가 자신의 쓴 글에 책임을 지지 않고 기사를 쓰면 사기가 될 수 있으며, 객관적인 입장에서 논리정연하게 사설을 쓰지 않으면 설사로 전락할 수 있다.

‘성실(誠實)’하지 않으면 ‘실성(失性)’하고 ‘지금’ 하지 않으면 ‘금지(禁止)’되며, ‘실상(實狀)’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으면 ‘상실(喪失)’의 아픔을 겪을 수 있다. 언제나 성실하게 안 된다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에 시비를 걸고 금지된 곳에서고 가능성의 세계를 찾아 도전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문이 열리는 법이다. 내 주변의 실상을 주도면밀하게 파악, 대안을 모색하기 시작하면 반드시 길은 열리는 법이다. ‘세상(世上)’을 똑바로 살지 않으면 ‘상세(詳細)’하게 목표를 설정할 수 없으며, ‘사상(思想)’을 똑바로 세우지 않으면 ‘상사(上司)’조차도 되지 못한다. ‘사고(思考)’하지 않으면 ‘고사(枯死)’당하고, ‘등대(燈臺)’를 찾는 노력을 포기하면 ‘대등(對等)’한 입장에서 세상을 살아가기 어렵다. 남다른 생각을 갖기 위해서는 검색에만 열을 올리고 남의 사상 체계에만 매몰되지 말고 방대한 독서와 다양한 체험을 기반으로 깊은 사색의 물을 길어 올리는 사고연습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사색(思索)을 하지 않으면 얼굴이 사색(死色)이 되고 사고(思考)하지 않으면 심각한 사고(事故)가 나는 법이다. ‘책상(冊床)’에서 진득하게 공부하는 시간을 마련하지 않으면 고뇌하는 이슈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상책(上策)’은 떠오르지 않는다. 가끔 머리가 아프면 책상을 박차고 밖으로 나가 산책을 해보자. 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산책이다. 책도 중요하지만 읽은 책을 소화시키는 산책은 또 다른 사색의 여정이다.

‘작가(作家)’로서의 기질을 보여주지 않으면 ‘가작(佳作)’도 탄생시킬 수 없으며, ‘일생(一生)’을 목숨 걸고 살지 않으면 ‘생일(生日)’조차 맞이할 수 없다. ‘문인(文人)’들의 세계를 파고들지 않으면 ‘인문(人文)’의 세계로 진입할 수 없으며, ‘성숙(成熟)’하는 시간을 의도적으로 마련하지 않으면 절대로 ‘숙성(熟成)’되지 않는다. 성장 일변도의 외형적 몸집 불리기 전략보다 내면적 성숙을 위한 침묵과 고독의 시간을 갖지 않으면 화려하지만 겉은 비어 있는 껍데기로 전락할 수 있다. 키 크는 시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 뭔가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도약하고 싶으면 당분간 세상과 단절해야 한다. 세상의 소음과 ‘단절(斷絶)’하지 않으면 인생이 ‘절단(絶斷)’날 수 있으며, ‘성품(性品)’을 곱게 가꾸지 않으면 ‘품성(品性)’마저 망가진다. 성품도 개성이지만 혼자서 외로운 사투를 통해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과 믿음을 주고받는 인간적 관계에서 피는 꽃이다.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려 ‘변주(變奏)’하는 즐거움을 맛보지 못하면 ‘주변(周邊)’에서 영원히 서성거릴 수 있다. 필요에 따라서는 ‘용기(勇氣)’내어 과감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그 어디에도 ‘기용(起用)’되지 못한다. 한 분야에서 위업을 달성하려거든 치열하게 고민하되 과감한 실천을 병행해야 한다. ‘수고(手鼓)’하지 않으면 ‘고수(高手)’가 될 수 없으며, ‘체육(體育)’으로 몸을 단련하지 않으면 ‘육체(肉體)’를 잃을 수 있다.

‘교육(敎育)’을 똑바로 하지 않으면 미래로 향하는 ‘육교(陸橋)’조차 건설할 수 없으며, ‘굴비’에게도 배우려는 자세를 갖지 않으면 ‘비굴(卑屈)’하게 살 수 밖에 없다. 역발상을 시도하는 사람에게는 주변의 모든 게 다 스승이고 배움의 원천이다. 역발상을 시도하는 사람에게는 걸림돌과 디딤돌은 같은 돌이다. 걸림돌을 제거하면 디딤돌도 없어진다. 걸리적거리는 걸림돌도 생각을 바꿔서 다시 보면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디딤돌로 다가온다. 역발상을 시도하는 사람은 일상을 틀에 박힌 방식대로 되풀이하지 않고 작은 일이라도 되새김질을 해본다. 되새김은 각성과 성찰이지만 되풀이는 의식 없는 반복이다. 되새김질은 의미를 재탄생시키지만 되풀이는 의미의 동어반복일 뿐이다. 의미없는 반복은 반전을 일으키지 못한다. 작은 일이라도 진지하게 그 의미를 되새기면서 기회를 엿보는 절치부심과 호시탐탐 끝에 비로소 역전과 반전의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다. 되새김 없는 되풀이는 단순한 한풀이나 되풀이에 지나지 않는다. 되새김질 없이 되풀이만 반복하면 의미는 실종되고 재미는 도망간다. 되풀이는 되새김을 전제로 반복되어야 한다. 그 때 반복은 이전과 다른, 차이가 있는 반복이다. 차이가 드러나는 반복만이 반전을 일으켜 마침내 전세를 뒤집고 승리의 월계관을 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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