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책을 읽었다

호암자전



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리는데 보존서고에서 가져와야 하니 기다리라고 했다. 작년에 출판된 책이라고 하던데 벌써 보존서고에 가있나 갸우뚱하고 집에 와서 책을 펼쳐보니, 일본식으로 좌에서 우로넘겨 읽는 방식인데다가 조사만 빼놓고 죄다 한자가 가득하다. 이걸 어떻게 읽나 잠시 난감해하다보니 구판(86년판)을 빌린것이였다. 구판을 반납하고 다른 도서관에 가서 작년에 나온 신판을 받아보니 읽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

생의 마지막을 몇해 안남기고 집필한 책이라 그런지, 아니면 원래 성품인지, 호암의 일대기는 대부분 담담하게 기술되있다. 식민지 시대와 동란, 건국과 군사정권등 사업을 펼쳐나가는데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는 풍파를 온몸으로 겪었지만 그래도 달관모드다. 유학시절이나 20대 사업하던 시절은 부유한 집안 덕택으로 철없이 보냈다는 느낌도 들기도 하고, 여러 사업을 진행하는데 특별한 기술이나 경험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어떻게 잘 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하지만 당시 사업하는 사람들과 비교했을때 그가 크게 성공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3가지 점이 아닐까 싶다. 
첫번째는 왜 사업을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명확히 갖고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자신과 가족의 부와 명예를 위해서 사업을 한 것이 아니라 피폐한 나라와 국민을 위해 사업을 하고자 했다. 바로 사업보국이라고 하는 사명감과 대의가 없었다면 모진 시대풍파를 견뎌낼 수 없었을 것이다. 
두번째는 도전정신이다. 전쟁이후 제대로 된 인프라나 인적자원도 없고, 달리 참고할 만한 전례도 없던 상황에서 사업을 시작했고 대부분 국내 최초가 될수 밖에 없었다. 부족한 자원과 금전,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차관을 얻기 위해 해외를 동분서주 하며 정부의 역할까지 대신 했으니, 홀홀 단신으로 촛불하나만 켜고 깜깜한 산을 넘는 기분이 아니였을까 싶다. 
세번째는 통찰력이다. 맨땅이나 다름없는 1950년대부터 소비재, 경공업, 중공업 분야로의 로드맵을 가지고 국가 경제 발전에 대한 포석을 두고 사업을 확장했으며 국내만 생각하지 않고 외국과 경쟁한다는 자세로 기술을 도입하거나 설비를 확충해나갔다.

시대는 변했고 삼성전자는 세계최고의 전자메이커가 되었으며 업계 선두를 수성하는 입장에 서 있다. 불과 수십년 전의 호암의 이야기는 마치 위인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창업(創業)은 쉬우나, 수성(守成)은 어렵다고 한다. 1년 앞도 내다보기 힘든 첨단기업들의 경쟁상황에서 순식간에 기업이 뜨고 지고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여기 실패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호암의 글귀가 있다. ( 호암의 글인지 다른 사람의 글을 인용한 글인지는 잘 모르겠다 ). 시대가 변해도 세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지혜가 아닐까 싶다.

“나는 항상 청년의 실패를 흥미롭게 지켜본다. 청년의 실패야 말로 그 자신의 성공의 척도다. 그는 실패를 어떻게 생각했는가, 그리고 어떻게 거기에 대처했는가, 낙담했는가, 물러섰는가, 아니면 더욱 용기를 북돋아 전진했는가. 이것으로 그의 생애는 결정되는 것이다.” - 호암자전 63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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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 관심사

朴泰俊(박태준)이 본 日本


포스코가 위기에 빠졌을 때 그는 일본에 달려갔다
과거를 잊지 않은 일본인은 아낌없이 한국을 도왔다
그 '巨人의 時代'를 읽으면 지금 韓日은 너무 초라하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낸 철강인 박태준은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을 책에 기록했다. 수영대회에서 1등을 했지만 조선인이란 이유로 야유를 받고 2등으로 강등당한 일, 그리고 미군의 폭탄이 쏟아지던 날 방공호에서 겪은 일이다. "방공호는 질서가 정연하다. 이 일에 노인들 특히 할머니들이 나선다. '젊은이는 안으로 들어가라. 위험한 곳은 우리가 막는다. 왜 책을 들고 오지 않았느냐? 젊은이는 책을 펴고 공부해라.' 방공호 입구에 천막이 쳐지고 젊은이가 모인 제일 안쪽에 두 개의 촛불이 켜진다."

박태준은 1등을 빼앗겼을 때 "속이 끓었지만 참고 다스렸다"고 했다. 방공호에서 할머니의 질책을 들었을 땐 "식민지 대학생의 가슴으로 들어와 고국에 대한 책임감을 일깨웠다."고 술회했다. 일본이 준 분노는 참고, 감동은 받아들여 조국을 위한 동력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박태준과 비슷한 기록을 삼성 창업자 이병철도 남겼다. 유학을 위해 탄 연락선에서 1등 선실 근처로 갈 때였다. 일본 형사가 가로막고 막말을 던졌다. "조선인이 무슨 돈으로 1등 선실을 기웃거리느냐. 건방지게." 그는 "후일 사업에만 몰두하게 된 것은 민족의 분노를 가슴 깊이 새겨두게 한 그 조그마한 사건 때문"이라고 자서전에 썻다.

이병철은 패전으로 폐허가 된 전쟁 직후 도쿄의 허름한 이발소 이야기도 함께 기록에 남겼다. 주인에게 "이발 일은 언제부터 했느냐"고 물었다. "제가 3대째니까 가업이 된 지 이럭저럭 한 60년쯤 되나 봅니다. 자식놈도 이어주었으면 합니다만...", 그는 "일본은 절대 망하지 않고 재기할 것이라고 그때 생각했다"고 썼다.


1983년 8월 이병철이 후배 박태준을 일본 휴양지로 불렀다. '부메랑 효과'를 내세운 일본 철강업계가 광양제철소 건설에 협력을 거부할 때였다. 휴양지에는 당시 일본 정,재계 막후 거물 세지마류조, 그리고 10여년 전 포항제철소 건설을 지원한 일본 철강업계의 대부 이나야마가 함께 있었다. 이들에게서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둔 이병철은 "다른 말은 말고, 고맙단 인사만 드리라"고 박태준에게 말했다. 박태준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었다"고 술회했다.

이병철도 비슷한 고비를 넘겼다. 5개월 전 발표한 삼성의 역사적 반도체 투자는 핵심 기술을 제공한 일본 반도체 업체 샤프의 역할이 컸다. 일본이 처음 해외에 반도체 기술을 제공한 사례였다. 이병철은 "샤프의 각별한 호의였다"고 자서전에 기록했다. "샤프를 국적이라고 혹평하는 업자도 있었다."고 했다. 한일의 가교 역할을 한 세지마 류조는 회상록에 이렇게 기록했다. "한국은 통일된다. 일본은 반성하고 한국의 감정을 포용하면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기둥으로 하는 통일 한국이 탄생할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한다."


박태준은 일본에서 노동을 하며 자식을 키운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일본 총리 후보였던 유력 정치인과의 저녁 약속을 깰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이너스 성장에 허덕이던 1980년 한국은 일본의 도움이 그만큼 절실했다. 그날 박태준이 국익을 위해 약속을 취소하지 못한 일본 정치인은 아베 신타로, 현 일본 총리 아베 신조의 아버지다. 그는 평생 한국과의 우호에 힘을 쏟았다. 다음 날 박태준은 아버지의 이런 유언을 전해 들었다. "울지 마라. 열심히 살고 간다."

거인(巨人)들의 시대였다. 물론 그때도 갈등이 있었다. 하지만 큰 흐름은 거인들이 가슴에 품은 '대의(大義)'에 따라 움직였다. 풍요를 얻어 절실함이 사라진 탓일까. 나라가 늙어 포용력이 사라진 탓일까 그 시대를 읽으면 지금 한일 관계는 작고 얄팍하다. 유치하고 졸렬하다.


# 사족
1세대 기업인들의 일화는 들을때마다 전설로 다가온다. 말 그대로 격동의 시대 - 식민지, 전쟁, 가난, 냉전, 군사정권.. 를 뚫고 이뤄낸 그들의 성과는 오늘날 우리나라의 산업과 경제의 초석을 다져놓았다.  권력의 비호, 정경유착 등 어두운 면도 있다고 하지만 기업이란게 그것만 가지고 여러 세대는 커녕 한 세대도 살아남을순 없다. 
 지금 한일 관계를 유치하고 졸렬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위에도 적혀있듯이 예전엔 분노는 참고 감동은 받아들이는 기업가, 일부 막후세력이 있었다면, 지금은 분노만 부추키고 감동은 전혀주질 않는 양국 정치인과 그들로 인해 가득찬 선동만 팽배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때로는 앞으로 나가려면 Let it go 정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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