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 관심사

한반도의 분단과 전쟁 그리고 통일에 대한 단상


일본은 원자폭탄을 맞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의 전략적 판단으로 전승국들의 공동점령은 피했다. 그 대신 공동점령아닌 점령이 벌어져 한국의 분단으로 이어진다. 북한정권이 몰락하더라도 지금의 한반도 주변 정세는 2차 세계대전 막바지 때와 별 다를께 없어보인다. 우리는 무엇을 준비하고 있나.


어이없이 이루어진 한반도의 분단


금년은 한반도가 분단 된지 69년째 되는 해이다. 이토록 분단이 오래 지속되고 있지만 왜 한반도가 분단 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누가 분단했는지, 왜 그렇게 했는지에 대해서 서로 다른 주장들이 난무하고 있다. 미국 때문에 분단이 되었다며 미국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이승만 대통령을 분단의 주역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다가 소련이 붕괴된 이후 공개된 비밀 자료를 보니 북한에 단독 정부를 세우겠다는 소련의 결심이 이승만 대통령의 단독정부안 보다 훨씬 오래 전 계획이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분단에 대한 다양한 설명들이 있지만 한반도가 분단되는 최초의 과정은 사실은 ‘어이 없는 일’ 이었다.

한반도의 분단은 2차 대전이 끝날 무렵 그야 말로 황급하게 결정된 일이었다. 1943년 11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미국, 영국, 중국의 수뇌들이 한국을 해방, 독립 시켜주겠다고 선언 했었지만 그들은 한국인들의 노예상태가 얼마나 혹심한 것인지,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다. 이들의 한국 해방 계획은 전혀 구체적인 것이 아니었다.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하고, 일본만이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었다. 일본과의 전쟁을 주로 담당해 욌던 미국은 소련의 대 일본 전쟁개입을 종용했다. 미국은 만주에 있는 일본의 관동군을 대단히 막강한 세력으로 과대평가하고 있었고 소련이 이를 처리해 주길 원했다. 소련은 미국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이핑계, 저핑계로 일본에 대한 선전 포고를 미루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45년 8월 6일 미국이 히로시마에 핵폭탄을 투하했고 일본의 패망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바로 이때 소련은 일본과의 전쟁을 선언한다. 8월 9일 새벽 0시의 일이었다. 일본군을 파죽지세로 몰아부친 소련군은 8월 12일 한반도의 북단인 청진에 상륙했다.

8월 13일 만주와 한반도에 대한 소련의 야심을 알고있던 미국의 모스크바 특사 에드윈 폴리와 소련 주재 미국 대사 애버렐 해리만은 미군이 한반도 전역과 만주의 주요 공업지역을 점령해야 한다고 건의 했다. 그러나 당시 트루먼 미 대통령은 ‘전쟁을 빨리 끝내는 일’ 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 이들의 건의를 채택하지 않았다. 이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한반도 전체를 미군이 점령하는 군사적전을 행 할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소련군은 이미 한반도에 진입한 판국인데 반해 한반도에 가장 가까운 곳까지 진출한 미군은 한반도로부터 거의 1,000Km 떨어진 오키나와에 도달해 있을 뿐이었다. 이미 8월 10일-11일 밤, 미국 국방부의 존 맥클로이 차관보는 소련군이 한반도로 물릴 듯 밀려오는 상황에서 러스크 대령과 본스틸 대령을 불러 가능한 한반도 북쪽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야 한다는 정치적 희망과 미군이 당도할 수 있는 현실적 한계 사이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정책을 만들 것을 지시했다.

이 두 대령은 1960년대에 각각 외부부 장관, 주한미군 사령관을 역임하게 된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들이었다. 두 대령은 1942년 판 내셔널 지오그라픽 잡지의 한반도 지도를 들여다 보다가 아이디어를 떠 올렸다. 38도선을 경계로 그 아래쪽은 미국이 그 북쪽은 소련군이 점령하면 좋겠다는 아이디어 였다. 38선 아래 쪽에 서울과 인천, 부산이 포함 된다는 사실이 좋았다. 두 대령은 38선을 지정, 작전국장 조지 링컨 준장에세 보고한다. 링컨 준장은 40도 선을 구상했지만 현실적으로 두 대령의 제의를 받아 들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재셔널 지오그라픽 지도를 보고 결정한 이유는 제대로 된 한반도 지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1990년 한국전쟁 40주년 기념 차 서울을 방문했던 러스크 장관은 소련이 38도를 받아들이지 않을 지도 모른다고 우려했었으며, 소련이 이를 쾌히 받아들여서 오히려 놀랬다고 회고 했다. 8월 15일 일본은 항복을 했고, 소련군은 천천히 진격, 8월 24일 38선 이북을 모두 점령했다. 미군은 9월 8일에야 겨우 인천에 상륙, 한반도의 남쪽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한반도 분단선인 38선을 생각한 것은 미국 사람들이니까 미국 때문에 한반도가 분단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그것은 미국의 사악한 의도이기보다는 어이없는 실책의 결과였다. 소련이 없어도 충분히 이길수 있는 전쟁에 소련을 불러 들였고 한반도는 분단 되어버리는 운명이 되었다. 학자들은 미국의 38선 획정을 ‘군사적 편의주의’에 의한 비 전략적 결정이라고 본다.


남북한 두 개의 정부 수립

38선은 수십 만 명의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던 한반도 점령작전을 위한 임시방편적 구상이었지만 원래 의도와는 전혀 달리 남북한 두 나라를 형성케 하고, 전쟁까지 야기한 엄중한 국경선이 되고 말았다. 미국과 소련은 2차 대전 당시에는 나치 독일과 군국 일본을 상대로 함께 싸운 동맹국이었지만 주적이 사라진 후 상호 협력하기에는 너무나도 다른 정치 경제체제를 가진 나라였다.

세계의 공산화를 목표로 하는 혁명국가 소련은 단 6일 동안, 전쟁같지도 않는 전쟁을 치룬 후, 한반도의 절반을 획득하는 횡재를 했다. 소련이 그같은 횡재를 미국에게 양보할 리 없었다. 소련과 달리 미국은 세계를 향한 전략적 구상이 없었다. 미국이 원하는 것은 빨리 전쟁을 마치고 평상으로 돌아가겠다는 것 뿐 이었다.

당연히 한반도 문제에 대한 미소간의 협상에 진전이 있을 수 없었다. 남북한에서는 각각 별개의 독립 정부를 수립하는 방향으로 상황이 전개 되고 있었다. 1946년 6 월 3 일, 남한의 정치 세력을 대표하는 이승만 박사가 전라북도 정읍에서 ‘남한에서만이라도 단독 정부를 수립’ 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의 언급을 했고 이 ‘정읍 발언’ 은 두고두고 이승만 박사에게 분단의 원흉이라는 멍에를 씌운 계기가 되었다.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의 이정식 교수는 소련이 붕괴 된 후 공개된 소련의 문서를 뒤지던 중, 1945 년 9 월 20 일 당시 소련 수상 스탈린이 이미 ‘북한에 정권을 수립하라’는 지령을 내린 것을 발견,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화 시킨 원흉이 스탈린이라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결국 1948년 8월 15일 남한에는 미국식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를 근간으로 삼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 되었고, 9월 9일 북한에는 소련의 적극적 지원이래 김일성을 수반으로 하는 공산주의 국가가 수립 되었다. 한국정부가 먼저 선포 되었지만 정부의 골격을 보다 더 일찍 갖춘 것은 북한이었다.


북한의 침략전쟁

남과 북에 독자적인 정부가 수립된 원인 그 자체가 적대감과 갈등의 산물이었다.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국내 세력과 이를 지지하는 소련의 지원으로 설립된 북한과 자유민주주의를 지지하는 한국 국민과 미국의 지원으로 수립된 대한민국의 공존은 사실상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소련은 북한을 신생국이라고 하기 에는 놀라울 정도로 막강하게 무장 시켰다.

​세계 각국의 공산 혁명을 목표로 하는 소련은 북한을 통해 아시아에 대한 공산주의 확산 계획을 실행에 옮길 예정이었다. 북한은 아시아 공산주의 확산의 교두보였고 실제로 북한은 모택동의 공산군에게 무기까지 지원, 중국의 공산화를 지원했다.

역사가 지난후 밝혀진 사실이지만 김일성은 대남 침략 전쟁의 필요성을 오히려 먼저 나서서 역설했다. 외세의 힘을 빌어 동족의 10% 이상을 죽거나 다치게 한 민족 상잔의 장본인인 김일성과 북한이 자신을 민족주의의 수호자인 것처럼 말하며 대한민국을 외세의존적이라며 비난하는 것은 정말로 웃기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공산주의의 팽창주의 야망에 무감했던 미국은 한국 전쟁을 통해 본격적인 냉전의 전사로 탈바꿈한다. 미군이 주도하는 유엔군의 도움으로 멸망의 위협에서 간신히 벗어 날 수 있었던 대한민국은 중국의 도움으로 역시 멸망의 위기에서 간신히 벗어난 북한과 운명적 대결을 벌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빠져 들어갔다. 6.25 한국 전쟁 때문에 대한민국과 북한의 관계는 처절한 적대 관계로 빠져 들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으로 전쟁이 임시 마무리 된 이후, 남북을 가르는 선은 38선에서 휴전선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휴전선은 1953년 이래 지금까지 세계 역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철벽 국경선’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통일의 논리와 당위

잔인한 전쟁을 경험한 대한민국은 국가안보를 최우선 목표로 삼아 군사력을 대폭 강화시키는 한편, 경제발전에도 매진했다. 60년대 대한민국은 당시 온 국민이 외쳤던 구호처럼 ‘싸우면서 일하는’ 나라였다. 대한민국은 70-80년대에 이르자 북한을 온갖 면에서 압도하기 시작했다. 민주주의를 이룩했고 경제발전을 이룩했다. 군사력에서도 북한을 앞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평화 통일’을 제외한 다른 방법의 통일은 추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전쟁에 패배할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잿더미위에 이뤄진 통일, 수많은 국민이 죽고 다친 후에야 얻어 질 통일이라면 차라리 시간을 두고 기다리겠다는 의미였다. 시간은 우리 편이라는 확신도 있었다. 실제로 1980년대 말 공산주의를 지향했던 모든 국가들은 스스로의 모순으로 인해 모두 다 붕괴되고 말았다. 먼저 변신한 중국과 월남 등은 체제 붕괴를 모면했다.

분단이 될 당시 남한 보다 훨씬 잘 살았던 북한은 60년이 지난 후에도 주민들에게 고깃국에 쌀밥을 제공한다는 목표를 이루지 못한 세계 최 하위의 빈곤국가로 남아있다. 북한보다 가난한 상태에서 시작한 대한민국은 이제 음식을 먹을 때, 뚱뚱해 질까봐 칼로리를 따지는 나라가 되었다. 남북한중 누가 통일의 주역이 되어야 할지는 이미 자명한 일이 되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북한의 극소수 권력자들은 오로지 권력의 생존만을 위해 3대 세습이라는 기괴한 방법으로 온 북한 주민들을 봉건군주제하의 신민으로 만들어 버린 동시에 핵개발을 통해 대한민국과 세계를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통일의 서광이 비치고 있다. 북한정권의 종말이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주석궁을 경호하기 위해 탱크 100대를 배치했다는 소식, 고모부마저 잔인하게 학살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 북한 권력의 원천인 군부의 지휘세력이 정신없이 뒤 바뀌고 있다는 사실들은 북한의 절대 권력이 종말에 이르고 있음을 말해주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북한 주민들은 점차 외부 세계에 대해 알게 되었다. 대한민국이 자신들보다 훨씬 잘 살게 되었음을 아니 북한 주민들은 김정은 정권의 몰락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그동안 대한민국은 북한에게 발목을 잡혀 있었지만 통일을 이룩한다면 우리는 세계를 향해 쭉쭉 뻗어나갈 수 있다. 통일은 통일 후의 정치, 경제, 안보를 고려할 때 어느 측면을 보아도 대박이 아닐 수 없는 기쁜 사건이 될 것이다.

분단을 초래한 주요 원인이 국제정치적인 것이었는데 작금의 국제정세 또한 한반도의 통일을 가능케 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다만 유념해야 할 문제가 있다. 예측 불허의 김정은 권력이 얌전하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통일이 저절로 이뤄 질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이에 철저하게 대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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