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 관심사

너희들이 '정체성'을 아느냐

정체성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동의 아래 교육되고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정체성은 우리가 획득한 것인가?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주적이 북한이고 우방은 미국이다"라고 입밖으로 말하는 순간 '수구보수꼴통'으로 치부되는 세태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전교조를 와해시키고 교과서를 국정으로 변경하여 좌편향 상태를 우측으로 끌어당기려는 시도는 과연 성공해서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도움이 될까?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역사교과서 문제도 정체성과 떼놓을 수 없는 문제다. 국정화냐 검정이냐 소모전하느니 세계사를 필수로 교과과정에 반영하는게 어떨까 싶다. 한 나라의 역사와 경제는 세계사적 흐름에서 놓고 봐야 자연스럽게 이해가 된다. 그저 반일이냐 아니냐 친재벌이냐 아니냐, 종북이냐 아니냐 좁은 잣대만 들이대다보면 답이 나올 수가 없다.



'정체성'을 주제로 강연 요청이 들어왔다.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가 어떤 나라이고 대한민국에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짚어달라는 주문이겠다. 대략 난감이 아니라 심히 난감이다. 답은 쉽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주적이 북한이고(물론 북한 주민들을 말하는 건 아니다) 우방은 미국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수구 보수 꼴통'이 되어 버린다. 그렇게 찍히는 게 두려운 게 아니라 사실을 말하고 돌을 맞는 상황 자체가 싫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래. 고맙게도 소생의 고민을 김정은이 한 방에 해결해줬다. 적어도 안보에 관한 한 대한민국은
정신을 차린 것 같다. 옛 선인의 말에 '전쟁은 난폭한 교사(敎師) '라고 했다. 적당히 난폭한 수준에서 배우고 
깨달았으니 그 또한 다행이다. 거기에 더해 1953년에 맺은 한미상호방위조약에까지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니 그것도 소득이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조약을 체결하면서 "이것이 앞으로 우리 민족을 편하고 잘살게 해 줄 것"이라는 예언 같은 말을 남겼다. 예언은 위기 때마다 우리를 살렸다.

문제는 또 하나의 정체성인 자본주의라고 불리는 시장경제다. 자본주의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체감온도는 영도(零度) 아래다. 차갑고 냉혹하고 비인간적인 느낌뿐이다. 자본주의는 19세기의 발명품이 아니다. 교환, 거래, 이윤 추구 같은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이 작동하기 시작한 건 까마득한 신석기시대부터다. 타고난 인간의 심성이 자본주의적이라는 얘기다.


지중해를 제패한 페니키아 사람들이 무역, 화폐, 어음을 구사하면서 자본주의 시스템은 완성된다. 그리고 그것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하는 과정이 인류의 역사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시스템은 '선함'과 '옮음'에서 출발한 게 아니다. 최대 다수의 '이기심'을 보장하는 것이 모든 제도의 시작이다. 이기심을 강제로 포기해야 했던 사람들을 핑계 삼아 등장한 게 사회주의다. 사회주의 운동의 오류는 '보완책'을 '대안'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시장이 아니라 인간을 손보는 실험이 벌어졌고 모조리 실패했다. 그리고 그 폐허에서 다시 자본주의를 시작해야 했다. 자본주의 남베트남을 멸망시킨 공산주의 북베트남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 간 길은 남베트남이 갔던 길이었다. 시간만 까먹었다.

자본주의 경제의 핵심은 시장 원리와 기업가 정신이다. 마르크스 경제학은 이렇게 말한다. "노동자가 여덟 시간 일한 것의 반은 노동자의 몫, 나머지는 자본가의 차지." 절반만 맞다. 이 명제가 타당하려면 그렇게 생산한 제품이 시장에서 다 팔려야 한다. 그런일은 없다. 시장은 냉정하다. 더 싸고 더 좋은 제품이 나오면 나머지는 싹 반품이다.

이윤에 대한 올바른 설명은 자본가가 착취한 노동이 아니라 기업가의 도전 정신에 대한 시장의 보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학기부터 고려대, 연세대, 한양대 등 3개 대학이 정규 강의로 '대학 기업가 강좌'를 신설한 것은 신선한 발상이다. '가장 탐욕스러운 자에 의해 착수되었고 가장 냉혈한 자에 의해 강화되었으며 가장 무능한 자에 의해 정체가 드러난' 것으로 규정했던 시장경제에 대한 80년대식 사고는 끝날 때가 되었다. 정체성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공통체의 동의 아래 교육되고 만들어지는 것이다.


,
이런 책을 읽었다

편견에 도전하는 한국 현대사


어느 사이트에서는 민주화라는 말이 반대라는 뜻으로 희화화 되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민주화라는 단어가 어느 순간부터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민주화라는 단어는 사용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전세를 놓은 것 마냥 성역화되있고, 관련 역사적 사건과 사실들은 반론의 여지가 없고 의심을 품으면 친일파, 유신잔재 식의 매도가 이어지기도 한다. 뭐 그대로 뒤집으면 한쪽에서 그동안 가열차게 몰아대던 빨갱이 놀이겠다.

중고등학교 꾸준히 역사시간을 통해 동서양을 배웠지만 정작 우리 나라가 생겨온 과정과 내용을 속시원하게 배운적은 없었던 것 같다. 아직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정치적인 이해가 걸려있고, 견해차가 골이 너무 크기도 했개 때문일 것이다.  어째됐든 민주 반민주, 친일 반일 식의 편협한 구도로만 한국 근현대사를 쳐다보기에는 역사의 풍파는 너무도 깊었고 세계사의 흐름과 강대국의 행보는 우리가 당시에는 상상도 못했을 정도로 크기만 했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제목의 "편견에 도전한다"라는 말은 이 흐름과 행보, 세계질서를 보면서 현대사를 살펴보자라는 것이라고 본다.  대한민국이라는 작은 우물과 척박한 땅에서 그 흐름과 행보를 꿰뚫어보며 나라를 이끌었던 지도자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발전하게 되지 않았나 싶다. 

대한민국은 풍파를 거쳐 여기까지 왔다. 높다란 세개의 허들을 실수 없이 넘었다. 이승만의 자유시장경제 선택, 박정희의 산업화, 그리고 민주화. 이 허들을 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분들과 사건들은 과연 현재 제대로된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일까 ?


'이런 책을 읽었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커피 한잔 할까요  (0) 2015.09.16
부동산 매매.임대사업자 세무 가이드북 실전편  (0) 2015.09.07
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0) 2015.08.31
중종의 시대  (0) 2015.08.26
직장학교  (0) 2015.08.20
,
  [ 1 ]  

최근 댓글

최근 트랙백

알림

이 블로그는 구글에서 제공한 크롬에 최적화 되어있고, 네이버에서 제공한 나눔글꼴이 적용되어 있습니다.

태그

링크

카운터

Today :
Yesterday :
Total :